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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일상

[일상] 도시락, 와인, 한강, 약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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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한낮 12시였다. 지워지지 않은 아이섀도우가 흐느적거리듯 눈을 괴롭혔다. 향수냄새와 담배냄새가 희미하게 밴 맨투맨을 벗으며 몇 시간 전 이태원 거리에서 먹은 피자와 동이 터오던 아침,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던 클럽이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갔다.

뜨거운 바람이 창문을 통해 불어왔다.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시간 뒤에 반포에서 보기로 약속을 한 뒤에 나는 느긋하게 주방을 어지럽힐 채비를 했다. 그 날은 도시락을 준비해서 한강에서 피크닉을 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준비해온 몇 가지 메뉴들을 정갈하게 돗자리 위에 내려놓았다. 

친구가 사온 돗자리의 유치한 무늬를 조롱하며, 우리는 우리만의 파티장을 조심스레 만들어갔다.

와인 오프너와 일회용 와인잔, 반포 한강공원, 이렇게 세 가지 단어의 배열의 낭만을 머리 속으로 재정립했다.

​뾰족하게 부서지는 햇빛을 담기 위해 조리개값을 16으로 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재미없는 공놀이를 하는 가족과 사랑을 속삭이다 지쳐 늘어진 연인들이 빼곡하게 가득 차있었다. 태양은 지듯 아니 지듯, 일렁거렸다.

​이베리코 등심을 굽고 남은 기름에 라드를 조금더해 조사놓은 신김치와 이베리코 등심 조각과 고추장을 달달 볶았다. 돼지기름에 푹 절여진 재료들에 강한 열이 강해지자 식욕이 당기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거기에 고슬고슬한 밥, 약간의 파프리카 파우더와 소금을 더해 강불로 10분을 볶아내니 퇴사 후 볶음밥 가게를 차리고 싶은 열망은 강해져만 갔다.

쪽파를 뿌려내어 포장했고, 친구의 찬사를 받았다.

​오리가슴살을 구워내어 일본 키리모찌와 약간의 올리고당과 함께 담았다.

​실파와 다진 한우를 이용해 만든 이나리즈시.

예전에는 한우 채끝을 스테이크하듯 시어링해놓은 뒤 조각 내어 밥이랑 섞었는데 고기의 풍미를 내기 위해선 그 방법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꽉 찬 밥의 느낌과 시큼달콤한 밥알, 고슬한 쇠고기, 풋풋한 실파.

​보름달이 뜰 때 수확한 올리브로 만든 오일에 이탈리아 비네거와 소금을 섞어 연어를 위한 소스를 만들어냈다. 미지근한 물에 담궈놨던 루꼴라와 노르웨이 연어뱃살을 뒤섞고, 비네거 소스를 슬슬 뿌려내니 화이트 와인을 위한 최적의 안주로 변했다.

​고래, 그리고 유토피아.

핀카바카라의 3015는 내 블로그 애독자라면 한 번은 보았을 와인이다.

그 글을 보고 자기도 마셔보고 싶다고 애절하게 말하던 친구는 결국 이 와인을 구해서 가져왔고, 브리딩을 위해 오픈 후 코르크를 뒤집어 막아놓아 잔디밭에 내려놓으니 드러누운 사람의 시야로써는 너무나도 평화롭고 옛 그림같이 동화스러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알바리뇨와 리슬링을 섞어 만든 스페인 와인의 순수함과 서늘함은 사과주스처럼 명백했다.

​보냉백에 얼음을 쏟아붓고 한시간 정도 식히니 얼추 차가운 음료로 변했다.

건배를 하고, 사진을 찍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우울하게 조금 나누었다. 사랑은 슬프지만 그 슬픈 사랑을 죽이면 더 슬퍼질거야. 꼭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랑이 가져다주는 강박은 견디기가 힘들다. 몇 번 머리를 싸매고, 그 횟수만큼 와인잔을 비워냈다.

​좋은 올리브를 구하는게 까다롭다는 것은 안다. 그래도 식품매장에서 구해온 이 올리브는 너무 격이 떨어지는 맛이었다. 바질에 무쳐낸 블랙 올리브는 그나마 먹을만 했었다. 며칠 전 먹은 맛있는 그린 올리브가 떠올라서 더 슬퍼졌다.

​하늘색과 연분홍색으로 밤이 찾아왔다. 바람이 불었고, 두터운 맨투맨에도 추워할 틈은 있었다.

밤의 한강은 아름답구나, 친구가 말했고 나는 그 문장을 들어 기억했다.

​세시간의 브리딩을 거쳐낸 이 와인의 주둥이를 잡고 냄새를 맡으니 갈색으로 변한 달콤한 건포도, 라즈베리과육을 품은 초콜릿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렇게 강건한 놈을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변하게 해준 것은 인내와 시간이었다. 사람도 같다.


요새 내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잦다. 술을 따를 때 손이 미치게 떨리는 건 괜찮아도 내가 나를 잊는다는 건 참기가 힘들다.

늦은 시간까지 한강에서 코까지 골면서 선잠에도 들어보고, 모기를 쫓으려고 고개를 돌리니 오후에 뿌렸던 향수냄새에 몽롱히 빠져들었다. 아, 정말 날 돌게 만드는 이 삼나무에 바닐라빈을 무한히 떨어트린 향, 그 것으로 솜사탕까지 만들어낸 향기, 나무 널빤지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 쉬었을 때에만 가질 수 있는 달콤함을 느끼고 친구가 끓여온 라면을 먹었다.

밍밍한 마늘향이 감도는 면발을 둘둘 감아 보드랍게 먹었다.

피곤하고 우울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서로 진실한 공감을 주었던 대화였기 때문에 채워지는 조각들은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피곤하니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