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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일상

[고찰] 내가 메갈련이 된 계기(1).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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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어마어마한 흉자였다. 어릴적 교회에서 배운대로 낙태를 경멸했으며, 권능이 없어 남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여자를 기생충처럼 취급했고 아무리 2자리 이상 나이차이가 나는 남자를 만나도 더치페이가 인간의 미덕이자 여자의 유일한 존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메갈리아라는 단체가 등장할 때의 내 반발심 역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부터 깨어있던 친구들이 내 마음을 긍정적으로 돌려보려고 회유도 해보고 채찍질도 해보았지만 내 마음은 한결 같았다.

"그렇게 과격한 페미니즘 때문에 여자가 욕 먹는거야. 일베랑 메갈이랑 다를게 뭐니?"

그들은 나에게 너무 낯설었고, 불편했으며,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해선 여자도 군복무와 더치페이를 해야한다는 것이 나의 당연한 지론이었다.

나는 그 당시 현대 사회에서 누릴 기본적인 권리에는 의무가 딱히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뭔가를 제안하고 싶다면 늘 들었던 소리가 이것이었다. "주장하기 전에 의무부터 다 하렴". 그 말은 사람의 입을 휘어잡고 두 눈에 막을 씌워 마치 사슬에 꿰인 짐승의 목처럼, 실재하지 않는 의무를 찾아 끊임없이 허황된 노력을 하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그렇게 온라인에서 메갈리아와 싸우고 또 싸웠다. 정말 열심으로 화내고 남자들의 불쌍함을 주장했다.


2.
나는 그 당시 오늘의 유머라는 진보 사이트에서 활동을 했다. 그 당시엔 여자와 남자 비율이 비슷했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개념녀 여고생으로 베스트오브베스트 게시판에 올라가기도 했으며,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2013년 크리스마스에 시청에서 시위를 할 때도 그 곳에 나를 기댔었다.

물론 그 곳에서도 메갈리아를 경멸했다. 나에게 그들은 언제나 옳은 잣대였음으로 그렇지, 그렇지하며 동참했다.

"스텔라님은 페미나치랑 다르시네요."

그 말이 벼슬이자 족쇄였고 우쭐함이자 중독이었다. 그럴수록 열심히 메갈리아를 때렸고 또 때렸고 어떻게든 상처를 주려고 열심히....

그러던 어느 날, 맥심이라는 성인용 화보에서 여성 범죄를 주제로 한 화보를 찍어 사단이 났다. 많은 여성들은 어떻게 여자들에 두려워하는 주제로 성적인 컨셉을 잡아 화보를 찍은거냐, 항의를 했고. 맥심의 주독자인 남성들은 그녀들을 프로예민러로 일컫었다. 나는 이때부터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어보였지만 내가 믿고 의심치 않았던 그들은 전면부정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아, 이 분들이 아직 뭔가를 몰라서 그런가보다. 내가 조금 더 증거를 알려주면 생각이 바뀌지 않을까?라고 순진하게 믿어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논란의 주인이자 매개체인 맥심이 여성혐오와 장애인비하 요소를 담은 컬럼을 쓴 사실을 발견했다. 정성스레 캡쳐를 했고, 글을 올렸다.

"맥심의 여성혐오가 심하네요."

그들은 날 물어뜯고 할퀴었다. 메갈이리아 본진으로 돌아가라는 글이 첫 댓글이었고, 남성잡지니 어쩔 수 없다는 댓글들이 중반부를 차지했으며, 여성시대라는 말로만 들어본 대형여초로 돌아가라고... 나는 혼란에 빠졌다.

상처 받았으며 괴로웠다. 나는 반박을 할 정신도 없이 오늘의 유머를 탈퇴를 했으나 내가 탈퇴를 한 사실을 알아챈 그들은 내가 떠난 후에도 내 마지막 장소에서 결국 메갈년이 맞았네, 여시충이네, 꼴페미네를 떠들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고민을 하던 중 도대체 메갈리아가 뭐길래.. 싶은 심정으로 메갈리아에 접속해서 개념글로 등극한 베스트글들을 차근차근 읽었다. 내 안의 무언가에 균열이 쩡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공감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이런 과격함으로 얻는게 무엇인가. 평등은 평화에 기인하는게 아니었나. 허망한 마음으로 몇날며칠을 살았다.

3.
토요일 어느날. 늦잠을 신명나게 자고 찌부둥한 몸을 이끌어 샤워를 하던 중이었다. 세계의 모든 진귀한 발명은 화장실에서 나온다는데 맞는 말인가보다. 그 날 나는 김이 서린 세면대 거울 앞에서 벽을 네다섯번 쾅쾅 두들겼다. 무엇을 위한 두드림인진 모르겠지만 속이 후련해지는 깨달음을 얻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간 내가 여성으로써 걸어온 입지와 위치, 부당함, 매일 매시 매분 겪은 성희롱과 폭력과 차별이 한번에 내 위로 무너졌다. 나는 그때 '약간' 분노하는 법을 깨우쳤다.

이건 마치 출근하기 전 날 잠이 지독하게 오지 않아 온 몸의 세포가 살아있을 무렵 줄줄이 떠오르는 흑역사의 파노라마와 느낌이 비슷했다. 나는 그 뒤로도 내 여성으로써의 아픔이 둥실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들 치마를 뒤집으며 성희롱을 하던 아이였으며, 중학교 시절 만나던 학급의 남자아이들은 누가 누구 가슴을 만졌네, 누가 걸레네, 라는 추문을 스스럼없이 자랑으로 여겼으며, 고등학교 때 늦은 밤 2시간 거리를 지하철을 타고 하교하던 내 옆에 앉았던 멀끔한 남자는 내 허벅지를 두시간 내내 쓰다듬었으며, 좋은 멘토로 여겼던 30대 남자는 술에 취해 날 끌어안고 옷차림이 자극적이다라는 말을 뱉었다. 젠틀하다 믿었던 남자친구는 성범죄영상들, 몰래카메라와 강간이 난무하는 소위 '국산야동'을 즐겨보는 사람이었다.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인상 좋은 남팀장님, 나만한 딸이 있는 남팀장님은 나에게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하하 농담을 하며 그 주위의 사람들은 폭소를 터트리고, 내 눈치를 일부러 보며 야한 농담을 하던 남과장, 술에 취해 내 신체를 강제로 터치한 남자직원과 아토피 상처를 보며 남자친구가 만든 키스마크냐고 묻던 남자. 가정적이던 남직원들은 룸성매매를 한 사실을 주고받고 순하던 남직원은 뒤에서 여직원들 품평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

치욕스럽고 눈물이 나는건 나의 경험은 내 친구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내 아픔은 그 아이들에게도 실재했고 그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토로에 나는 너무 심하게 공감이 가능하여 머리가 띵할 지경이 반복되었다.

몇가지를 깨닫고 내 주위에 믿을만한 남자들에게 달려가서 외쳤다. 그들은 늘 나의 "발견, 유레카"를 환영해주고 요즘 여자들 답지 않다며 추켜세워주었다. 나와 시국을 논하고 정세를 걱정하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소소하게나마 학구적인 성과를 위했던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달려가서 외쳤다.

이보세요. 내가 또 좋은거 알아왔어요. 남자들이 말하는 페미나치, 꼴페미, 김치녀는 다 허구예요. 제가 몰랐어요.

나는 아직도 잊기가 영 힘들다. 피던 전자담배를 머금고 고개를 돌리며, 나를 쳐다보던 눈동자를 바닥으로 하고 다같이 먼산만 바라보던 그 시간. 그들은 한두명씩 조용히 속삭였지만 그 표정은 나를 향해있진 못했다.

"그래도 그런 무개념녀들 있어.. 그래서 그래..."

고작 한남소리에 발끈했던 그들에게 결국 그 대답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힘들었고, 나는 그 정적인 공기와 내게 찾아온 환멸을 잊을 수 없다. 그 뒤로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성급한 일반화'를 하기가 싫어 정상적인 남자를 찾아 헤맸으나, 그렇게 많고 많은 인맥을 자랑하던 내 삶의 결과는 한없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는 그렇게 그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여전히 '메갈련'이 되지는 않았다.

추후 2편에서 이어 쓰겠음